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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맞고 달린 날, 할리가 내게 알려준 것들, 소나기, 생존본능, 낯선 주유소, 준비성

by 스노우닷 2025. 4. 17.

맑은 하늘을 믿고 나섰다가, 예고 없이 쏟아진 비에 온몸이 젖었던 날. 그날의 할리데이비슨 라이딩은 불편함 속에서 진짜 배움과 추억을 남겨주었습니다. 비 맞고 달린 날, 할리가 내게 알려준 것들 중 소나기, 생존본능, 낯선 주유소, 준비성에 대해 나누어보겠습니다.

비오는 산길, 달리는 오토바이 2대
출처 :할리데이비슨 용인점



 

비 맞고 달린 날, 할리가 내게 알려준 것들, 소나기

출발 전 날씨 예보는 강수 확률 0%. 아침 하늘도 말 그대로 청명했습니다. 푸른 하늘과 투명하게 보이는 먼 곳의 산. 믿고 싶을 만큼 예쁜 날씨였고, 저는 아무 거리낌 없이 팻보이를 타고 상주방향으로 향했습니다. 평소에도 자주 가던 국도 코스, 한적한 도로와 커브가 적당히 섞인, 스트레스 날리기 딱 좋은 길이었습니다. 차량 앞에 인스타 360 캠을 설치하고 천천히 바람과 풍경을 즐기기 시작했습니다. 그날은 라이딩이 유난히 즐겁고 좋았습니다. 출고한 지 3개월 정도 되었고, 매일 할리데이비슨 위에 앉고 싶은 시기였습니다. 배기음과 리듬감도 좋고, 바이크 반응도 부드러웠습니다. 구미 외곽도로에서 점심도 맛있게 먹고, 커피 한 잔 마시며 바이크 옆에 기대앉아 ‘오늘 진짜 완벽하다’는 생각까지 했을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식사를 마치고 나왔을 땐, 하늘이 순식간에 회색으로 물들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5분도 안 되어, 말 그대로 퍼붓는 소나기가 내렸습니다.

생존본능

초반엔 그냥 약한 비겠거니 하고 달렸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비의 양이 점점 세지고, 옷이 젖기 시작하니 감각도 떨어졌습니다. 헤스트라 가죽 장갑은 안쪽까지 흠뻑 젖어 손가락이 굳고, 헬멧 바이저 안은 김이 서려 앞이 거의 안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바이저 밖은 빗물이 세차게 내리쳐서 시야가 정말 안 좋았습니다. 3개월 차 할리데이비슨 초보라이더로서 말 그대로 '위기'를 온몸으로 느끼고 있었습니다. 비옷도 없었지만 입을 시간조차, 비를 잠시 피할 곳조차 없었습니다. 특히 도로 상태는 정말 위험했습니다. 굴곡진 곳이 있어서 많은 양의 비가 갑자기 내려 10~20Cm 정도 물이 고여있는 곳이 많았으며 머플러 안으로 물이 스며들까 봐 정말 걱정을 많이 했습니다. 아스팔트 위 기름과 먼지가 떠올라 노면도 극도로 미끄러워집니다. 평소라면 아무렇지 않게 지나갈 횡단보도 선에서 브레이크를 잘못 잡았다가, 뒷바퀴가 휙 미끄러졌습니다. 순간 심장이 철렁했고, 다행히 바로 중심을 잡았지만, 그 이후로는 무조건 감속 + 앞·뒤 브레이크 동시에 부드럽게 조작하는 걸 신경 썼습니다. 기어를 3단에서 1단으로 낮추고 기어가듯  그 구역을 지나갔습니다. 그날 깨달은 가장 큰 교훈은, 비 오는 날엔 ‘달리는 게 아니라 버티는 거’라는 겁니다. 속도는 절반으로 줄이고, 무조건 시야 확보 우선. 비상등 켜고 우측 갓길 쪽에 붙어 도로를 읽듯 달려야만 했습니다.

낯선 주유소

비를 피하려고 잠시 들른 첫 번째 주유소. 온몸은 젖어 있었고, 부츠 안엔 물이 찰랑거릴 정도였습니다. 장갑은 쥐어짜도 빗물이 계속 떨어지고, 핸들에 걸쳐서 마르지 않겠지만 말렸습니다. 그때 주유소 사장님이 저를 보고 빙그레 웃으며 말했습니다. “비도 한 번쯤 맞아봐야 진짜 할리죠. 그런 날이 오래 기억에 남는 거니까요. 오셔서 커피 한잔 드세요" 감사했습니다. 확실히 주유소 사장님 말씀은 맞는 말이었습니다. 그날처럼 절실하게 바이크를 느낀 적이 없었고, 그날처럼 노면과 하늘과 타이어 소리를 귀로 들은 날도 없었습니다. 불편했지만 그만큼 순수했던 순간이었고, 불안했지만 가장 또렷하게 기억나는 라이딩이었습니다. 비옷과 부츠의 중요성과 멋스러운 가죽장갑도 좋지만, 실용성 또한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준비성

그날 이후로 제 라이딩 습관은 많이 달라졌습니다. 일단 백팩 안엔 항상 얇은 방수 재킷과 여분 양말, 지퍼백을 챙깁니다. 장비가 과할 정도로 있어야 하는 건 아니지만, 최소한의 준비만으로도 비 오는 날의 고생을 반으로 줄일 수 있고, 무엇보다 마음이 든든합니다. 지나가는 소나기에 충분한 대응이 될 것이기에 자신감 있는 라이딩이 되었습니다. 또한 타이어 마모 상태, 브레이크 반응, 체인 상태를 비가 예보된 날은 더 자주 점검하게 됩니다. 평소엔 무던히 넘겼던 소리 하나하나가, 젖은 도로 위에선 리스크로 다가왔었습니다. 비 온 후 바이크는 꼭 깨끗이 닦아줍니다. 머플러 안쪽에 물이 고여있으면 부식이 생기기 쉽고, 체인도 꼼꼼히 오일링 해줘야 하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달라진 건, 라이딩을 대하는 마음가짐입니다. 예전엔 단순히 ‘간지’로 탔던 날도 있었지만, 이제는 ‘존중’하며 탑니다. 도로도, 날씨도, 바이크도 그리고 내 몸 소중히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비 맞고 달린, 그렇게 힘들었던 날이 저를 이렇게 만들었습니다. 아주 좋은 교훈을 배운 날이었습니다. 비는 라이더에게 불편함만 주는 게 아닙니다. 그 속에는 조심스러움도 있고, 때로는 사람과 사람 사이를 잇는 말 한마디도 있습니다. 언젠가 비 오는 날을 다시 만나게 된다면, 이번엔 조금 더 여유 있는 웃음으로 맞이할 겁니다. 왜냐하면, 이미 한 번 엔진 위에서 비를 이겨본 사람이기 때문입니다.